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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농 이야기

대야산방 이야기

대야산방 이야기


이야기는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1997년..
그동안 김천 ,문경 ,상주의 세곳에서 성황리에 전개되던 의류사업이
IMF라는 국제금융위기를 맞으며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뒤이어 찾아온 가장파탄,그리고 갑작스런 아버님과 할머님의 작고.

잘나가던 30대의 시절이었지만 세간의 속된 말로  아홉수를 겪는 것인지
서른아홉부터  이어지던  내가정과 주변의  불행은
나에겐 기억조차 하기 싫은 악몽같은 세월이었다.

급기야는 원형탈모증과 신경쇄약으로 인한  불면증,헛구역질,역류성 식도염  등등
건강도 덩달아 악화되고  정신도 피폐해져  젊디 젊은 나이에
세상과 하직하고 싶은  마음으로 늘 우울증에 시달리는 세월이 있었다.

월남가족이라  어디 마땅히 기댈만한 친척도 없었던 터이고 보니
시골에 홀로 살아계시는 조부님이 그나마 내겐 가장 큰 의지이며 위안이었다.

늦은 밤 가게를 마치고 1시간을 달려 시골에 도착하여
조부님 주무시는 모습 뵙고 챙겨온 밑반찬 몇가지 냉장고에 정리하여 넣고
시골의 튓마루에 앉아 우두커니 별을 바라보노라면
몸은 고되도 마음은 그리 편할 수가 없었다.

이러기를  8년 정도 했을 무렵 
유치원 때 부터 데리고 있던 아들녀석도 이젠 제법 커서 중학생이 되었고 
그동안 가게도 2개를 접고 김천가게만 중심지로 옮겨 운영하고 있을 터였다.

아이키우며 혼자 살아가는 모습이 안스러워 보였던지 
하루는 원장수녀님이 잠시 보자 하시더니
좋은 사람있는데 한번 만나보지 않을거냐고 조심스레  물어 오신다.

아직은 관심이 없다며  무심결에 사양하고 나서 조금은 후회도 하였지만
아마도 가정파탄의 휴유증이 나름으론 상당히 컸었던것 같다.

어릴 땐 한마디 말없던 아들 녀석이
어느날 갑자기 엄마한테 가고 싶다는 말을 건네오고
때마침 할아버님께서도  " 복지시설에 보내달라! 그러면 나도 편코 너도 편하지 않겠느냐"라며
저에게  어떤  모종의 변화를 결심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 하신다.

또한  이 무렵부터 나에겐 습관이 하나 생겼다.
밤시간 보다는 낮에 잠간씩 시골에 들어와  적막하기만 한 산 중턱의
전망 좋은 양지녘에  누워 한숨씩 자고가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마음과 몸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고
이 때부터 마음속에 귀농에 대한 마음이 서서히 삭트며
새로운 삶에 대한 준비와 설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언젠가는 이 곳에 아담한 흙집을 짓고 살아야지  ! "
" 언젠가는 이 곳에 아담한 흙집을 짓고 살아야지  ! "

그로부터 몇날,몇달을 고민하다가 드디어 결정을 내리고..
아들을 엄마한테 보내기로
그리고  할아버지가 계시는 시골로 귀농을 결심하게 된다.

 그당시 주변에서 모두 하나같이 만류를 했다.
애서 키운 아들을 왜 주느냐?
가진것도 없이 혼자 시골에 가서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이대로 재혼은 포기할 것이냐?

하지만  진퇴양난에 처한 나로선 더 이상의 퇴로도 방법도 없었다.

가슴이 찟어질 듯 아픈 마음으로 아들을 제 친엄마한테 보내 놓고
조부님께도 조금의 시간을 더 양해를 구한 후
이 때 부터 가게를 직원 맡겨 놓은 체  낮에 시골에 들어와 
이래저래 청소하고 그동안 묵혀 놓은 밭도 조금씩 일구며
귀농에 대한 꿈 아닌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낮에 시골에 갔는데
왠 스님 복장의 한분이 내가 늘 드러누워  하늘도 보고 낮잠도 즐기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땅을 파고 있지 않는가?

깜짝 놀라 무슨 일이냐고 여쭈니 조부님께 허락을 얻어서
지금 암자를 하나 지을 터를 닦는 중이란다.

아뿔사 ..이런 일이...

급히 만류하여 돌려보내고  그 날로 바로 가게를 내어 놓고
조부님께 한달내로 오겠다고 선언을 하게 되고
2006년 겨울에 대충 보따리 싸서 혼자 조부님 곁으로 귀농이란 것을 하게 된다.

시작할 땐 거금의 권리금을 싸들고  줄서서 기다리던 가게였건만
막상 그만둘 땐 단돈 십원 하나  손에 쥘수가 없었던 터이고 보면
귀농자금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의  어려운 형편이었다.

 한 해 농사지어  집짓는다며 기초공사하고 나니 빈털털이가 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무모한 일이었지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고
그래야 언젠가는 내가 좋아하는 이 곳에 집을 지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 이듬해 KBS의 "6시 내고향 "  프로에 출연을 하게되고
기야는 이 곳에 집을 짓겠노라고  전국 방방곡곡에  공표를 하게 된다.

그 방송 이후로 집 짓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농원을 다녀가면서 
이래저래 집터를 평가해 준다.

『  백리가 내다 보이고 농원앞을 냇물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니  명당 중에 명당이다.. 』
     여긴 절터다..팔지 않겠느냐?  절을 짓고 싶다.. 』
     풍수지리학의 교과서다. 』
     이렇게 멋진 곳은 처음이다. 』
『  빨리 집을 지어서 팬션으로 분양해라,,꼭 오고싶다. 』
『  백두대간이  아늑하게 감싼 정남향의  양지이니 집터중의 집터다.. 』
     수맥이 전혀 잡히지 않으니 여기서 잠자면 정신건강에 정말 좋을 것 같다. 』

 많은 전문가와 수많은 손님들이  다녀가면서  남긴 평가들이다

이런 것을 잘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좋은 말들을 수없이 들으니
나도 모르게  쇠뇌가 되어서 인지  아니면 정말 나도 뭔가에 끌려서 인지
이 곳에 와서 서있기만 해도 편하고 기분이 좋아지며
뭔가 가슴속 깊이에서 꿈틀데는 희망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금관계상  언제 집을 짓게 될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언제가는 이 곳에  꼭 집 지을 꿈을 키우며
틈만 나고 자금만 생기면 나무도 옮겨다 심고
바위도 날라다 조경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뜻밖의 인연으로 재혼도 하게 되고
할아버님이랑 저희 부부가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게 되면서
드디어 2009년  꿈에 그리던 그 장소에 집을 짓게 되고
" 대야산방 "이라 이름을 지었다.

『 대야산방 』
귀농 이후 이 곳에 서서 얼마나 많은 꿈을 꾸며 용기를 얻고 안식을 얻었던 곳인가?

그 곳에 꿈을 드디어 이루었다..
그동안 내게 많은 용기와 격려를 해주었던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내가 꿈을 이루었듯이 안식과 마음의 평화를 찾았듯이
앞으로 이 곳을  이용하는 모든 분들에게도

꼭 내가 이룬것 처럼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해 보며
끝으로 주님의 평화와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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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봉 복분자.호두 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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