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옥고
경옥고
장 은 경
“오늘 밤부터 다시 불을 때야 하는데, 당신도 같이 갈래?”
남편의 전화에 마음이 심란해졌다. 수은주가 영하 19도까지 내려갔던 지난 사흘 동안 홀로 고생한 남편을 생각하면 당연히 따라가야 하지만, 아이들 학원이나 공부를 생각하면 선뜻 따라 나설 수가 없었다. 또 여자가 대사에 나서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닷새에 걸쳐 만들어지는 경옥고는 이제 마지막 하루를 남겨두고 있다. 지친 남편을 응원하기 위해 온가족이 함께 도우러 간다면, 남편은 다시 힘을 낼 수 있으리라. 삼십 분 뒤, 갈아입을 옷가지와 반찬을 가지러 집에 들른 남편에게선 화독내가 진동했다.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잠들지도 못해서 며칠 사이 얼굴은 꺼칠해지고 초췌해져 있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마음 한구석이 짠하다. 흔쾌히 아이들과 내가 농장에서 마지막 날을 함께 지낸다고 하자 순식간에 표정이 환해진다.
성주 댐을 돌아 무주와 김천 갈림길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산골에 농장이 있다. 겨울철이면 남편은 그곳에서 가업을 이어받아 전통 경옥고를 곤다. ‘경옥고’는 동의보감 제일 앞쪽 ‘내경’ 편에 나오는 처방이다. 그 약효는 피로회복 및 면역력 증진, 여성 질환이나 폐경기 질환, 고혈압, 동맥경화 등 성인병과 노화를 예방하는 데 탁월하다.
약재를 씻고 다듬고 가루로 만드는 공정은 가족의 협력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약재들을 적당한 비율로 맞춰 골고루 섞어 항아리에 담는 과정은 어머님의 노련한 손끝을 빌린다. 항아리 속에서 인삼, 복령, 지황, 꿀이 한데 어우러져 하늘과 땅, 사람의 기운을 온전히 모아서는 뜨거운 불에 달궈지기만을 기다릴 때 그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비장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 다음은 집안의 남자들이 주관한다. 항아리 주둥이는 기름종이로 다섯 겹을 싸매고 두꺼운 천을 덮어 밀봉한다. 항아리는 큰 솥의 물 한가운데 단단히 매달아 사흘 밤낮으로 중탕하는데,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려면 장작불조절이 제일 중요하다. 조금의 흐트러짐이 있어서도 안 되며, 닭이나 개 우는 소리조차도 들려선 안 된다. 오로지 중탕되는 솥에 물을 채우고 장작불을 때는 일에만 주력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네 가지 약재는 좋은 약효만 남겨 검은 윤기가 흐르는 진액으로 서서히 농축된다.
그러나 나흘째 되는 하루는 장작불을 뺀다. 가마솥에 밥을 지을 때 뜸을 들이는 이치와 흡사하다. 경옥고는 이 과정을 통해 진액이 고농도로 농축되어져, 특유의 향과 빛으로 거듭나며 약효도 배가된다. 명품 경옥고를 만들고자 좋은 재료를 엄선하고 황금 비율을 맞추고 사흘 동안 중탕을 잘했다고 하더라도, 하루 동안의 기다리는 시간이 없다면 지금까지 공들인 것은 모두 허사가 된다. 봄을 기다리며 차가운 얼음 밑으로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경옥고는 이 기다림을 통해 더 숙성되어지고 강인해진다. 서로 모자라는 것은 채워주고 넘치는 것은 감해주는 이치다.
하루가 지나면 다시 24시간 불을 지펴야 한다. 겨울철 산골의 밤은 유난히 일찍 찾아오기 때문에 아이들과 나도 서둘러 허드렛일을 거들어준다. 어둠과 함께 차가운 북서풍이 휘몰아친다. 밤이 이슥해지자, 한옥 처마 밑에 매달아둔 풍경이 칼바람에 댕그렁거린다. 잠시 눈을 붙였는데,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 둘러보니 달빛이 방 안 가득 들어와 있다. 갑자기 아궁이의 나무가 다 탔는지, 중탕하는 솥의 물이 얼마나 졸았는지 궁금해진다. 녹초가 된 남편을 대신하여 밖으로 나서려니 무섭다. 다행히 환한 달빛이 동무가 되어준다. 장작더미에서 굵은 장작을 몇 개 골라 불구덩이로 밀어 넣고 중탕하는 물도 적당히 채워둔다. 일렁이는 불을 바라보니 잡념이 사라지고 모처럼 마음에 평화가 깃든다.
환한 달빛에 이끌려 마당 한가운데로 나선다. 차가운 밤공기가 심장을 돌아 내 몸 구석구석까지 퍼지자 정신이 번쩍 든다. 하루 동안 안으로 침묵하고 꿋꿋이 기다리는 과정을 통해 깊이를 더하고 숙성되는 경옥고를 지켜보면서, 나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아가리라 다짐한다. 내게도 경옥고와 같은 의미 있는 하루를 선사하고 싶다. 나에게도 꼭 필요한 성찰의 시간이 되리라.
오늘밤, 경옥고가 온몸으로 나를 일깨워준다. 현재의 삶에서 잠시 열기를 빼고 안으로 파고들어 가면서 참된 나를 만나라고 속삭인다. 느긋하게 여유를 갖고 사물을 바라보고 급할수록 천천히 돌아가라고 가르친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사색하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아보라고 손짓한다. 늘 긴장하고 다그치지만 말고 때로는 한 발 물러섬으로써 그 깊이를 더해 나가고, 내면의 힘을 응축시켜 참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해준다. 경옥고와 내가 처음으로 하나 되는 뜻 깊은 밤이다.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름 모를 별들과 환한 달이 중천을 가득 채운다. 홀로 시리도록 푸르른 밤하늘과 밝은 달, 영혼을 어루만져 주는 별들을 벗 삼아서 때 묻고 혼탁해진 마음을 다시금 다잡아본다. 하늘을 우러러 경건하게 두 손을 모은다.
지친 남편을 응원하러 따라 나선 길, 경옥고가 만들어지는 동안 못난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을 태우고 또 태워 마침내 명약으로 거듭났다.
생색이 난무하는 시대에 경옥고와 같은 군자의 덕을 좇고 싶다. 찬란하게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그 소망으로 내 온몸을 달구었다.
*2012년 계간지 <문장>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