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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상처

장 은 경

 

 어느덧 나이는 사십대 중반을 넘어섰다. 이제는 능력이 있고 없고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나이가 많다고 이 세상이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마주할 때면 입안이 까칠해지면서 뒷맛이 씁쓸할 뿐이다.

 

 지난겨울은 내게 시련과 수난, 좌절과 우울의 시간이었다. 창틈 사이로 차가운 칼바람이 비집고 들어오면 뼈 속까지 시려 잔뜩 움츠려 들었다. 따뜻한 봄은 언제쯤 내게 찾아올까? 영영 봄이 오지 않을 것처럼 차가운 북서풍과 폭설이 자주 내리더니, 발끝으로 느껴지는 땅 속의 기온이 어느새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단단한 바위와 자갈, 찰진 흙 사이를 비집고 물과 양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뿌리털을 내디뎌본다.

 

 가늘고 연약한 뿌리털이 땅으로부터 물과 양분을 조금씩 보내오며 메말랐던 세포가 하나씩 깨어나고 충전된다. 다시 힘차게 살아갈 용기와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래, 다시 힘내서 시작해 보는 거야. 나이 탓하지 말고 내 나이에 맞는 일을 찾아보는 거야. 더 이상 좌절은 금물! 우울은 집어던져 버려! 내가 디딜 땅이 있고 우러러 볼 수 있는 하늘과 태양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밑동을 타고 줄기를 지나서 가지 끝까지 수액을 전해줘야지. 봄이 되면 손바닥처럼 다섯 갈래로 갈라진 파릇한 잎들이 무성해질 수 있도록 쉬지 않고 물을 찾아 퍼 올려야겠지.’

 

 요즈음 내게는 고민이 하나 있다. 2월 말부터 3월 중순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해마다 그 무렵이면 허름한 옷차림의 한 노인이 전기드릴과 비닐주머니, 튜브 등을 들고 나타난다. 그 노인은 한눈에 봐도 착하고 욕심이 없다. 내게 오면 사람에게 말하듯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지냈다고 안부를 물으며, 밑동 둘레를 재어보고는 1미터 정도의 높이에 신중하게 전기드릴로 구멍 두 개를 조심스럽게 뚫고, 튜브를 꽂고 아래로 드리워 준비해온 비닐봉지에 연결한다. 그 정도면 내가 생장하는 데는 무리가 없고, 그 노인에게도 약간의 수액을 나누어 줄 수 있다. 물론 구멍을 내지 않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말이다.

 

 수액 채취 규정을 어기고 마구잡이로 구멍을 내고 수액을 채취한 결과, 해마다 친구들이 말라서 죽어가고 있다. 안타깝고도 슬픈 현실이다. 어쩌면 내게도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수액 채취는 나무의 지름에 따라 채취 구멍 수에 제한을 두고 허가 받은 사람만이 이를 채취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지름 10센티미터는 구멍 1개, 지름 20센티미터는 구멍 2개, 지름 30센티미터는 구멍 3개이다. 50년생인 나무에 올해 46세이니까 구멍 두 개쯤 내면 괜찮은데, 돈벌이에 눈먼 외지인들이 들어와 네다섯 개의 구멍을 뚫어 버리면 그 다음은 상상도 하기 싫어진다.

 

 고로쇠 수액은 우수 무렵인 2월 20일부터 1개월 동안만 채취가 가능한데다 채취량은 하루 한 나무에서 4리터정도로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채취농가들은 보다 많은 수액을 채취하기 위해 고로쇠나무를 아예 관통하거나 대여섯 개의 구멍을 뚫어 수액 채취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건너편에서 시들시들 병들어가는 친구들을 바라보면 한숨만 나온다. 그나마 착한 노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도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고로쇠, 고로실나무, 오각풍, 수색수, 색목이라고 부른다. 높이는 약 20미터이고, 나무껍질은 회색이다. ‘고로쇠’라는 이름은 뼈에 이롭다는 뜻의 한자어 ‘골리수(骨利水)’에서 유래된 것이다. 한방에서는 나무에 상처를 내어 흘러내린 즙을 풍당(楓糖)이라 하여, 위장병, 폐병, 신경통, 관절염 환자들에게 약수로 마시게 하는데, 즙에는 당류(糖類) 성분이 들어 있다고 하지만, 아직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한 것이거늘, 사람들은 몸에 좋다고 하면 식물, 동물 가릴 것 없이 해치고 빼앗아간다. 나무에게 필요한 수액이 단지 알칼리 생체수라는 이유로 사람들의 몸에 빨리 흡수되고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고, 어디어디에 좋다는 사고방식은 ‘인간만을 위한, 인간들의 착각’이 아닐까?

 

 내 몸에 전기드릴이 뚫고 지나간 상처가 세월의 무게만큼 하나둘 늘어간다. 어릴 적 마주보고 키 재기하며 같이 자란 고로쇠나무 친구들이 점차 줄어들고, 수액 채취 후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폐비닐로 비옥한 토양이 차츰 오염되어 가고 있다. 우리들이 시들고 말라죽어 가다보면, 결국 사람들도 우리들처럼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갈 것이다.

‘나 하나 잘살려고 다른 생명체를 함부로 훼손하고 갈취하고 파괴하는 인간들이여, 그대들이 우리들처럼 처절하게 고통 속에 죽어갈 날도 멀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봄이면 구멍 낸 고로쇠나무의 상처들이 내뿜는 처절하고 안타까운 충고를 되새기며, 그대만이라도 우리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기 바라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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