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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품앗이

벌초품앗이

장 은 경

 

 

추석을 앞두고 괜히 마음만 바빠진다. 벌초는 집안의 남자들이 하지만, 여자들은 모두 모여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 난 벌초 모임의 총무라서 미리 연락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장보아야 한다. 요즘 들어 기억력이 떨어져서 메모를 하고 장을 보아도 한두 가지는 잊을 때가 많다. 그래서 집을 나서기 전에 다시 메모부터 확인해본다.

 

산소에 가져갈 포 두 마리, 사과, 배, 소주, 캔 음료, 에프 킬라, 목장갑, 저녁에 구워 먹을 고기, 상추, 고추, 마늘, 기타 술, 음료수, 과일, 과자, 일회용품 등을 카트기에 담고 다시 메모지를 보며 빠진 것은 없나 중얼거리며 확인한다.

 

매년 3월 마지막 주말과 추석 이 주일 전 주말은 벌초모임을 가진다. 첫째 큰집에 세 가족, 둘째 큰집에 두 가족, 셋째 우리 두 가족, 시어른 두 분 이렇게 모두 모이면 스무 명 정도 된다. 예전에는 토요일 오후 큰집에 모여 벌초 한 군데하고, 저녁에는 아궁이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숯불에 고기도 구워먹고 술도 한잔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다음날 새벽에 다른 곳에 벌초하러 떠난다. 남자들의 새벽밥은 당번을 정해서 한 사람이 책임지고 차려주고 산소에 가져갈 술과 과일 등도 챙겨 보낸다.

 

요즘은 우리가 큰집 근처에 황토방 펜션을 짓고 나서부터 그곳에서 모인다. 난 주인장이라 서둘러 도착해서 화장실 청소와 부엌 정리부터 한다. 펜션을 이용한 손님이 설거지는 해놓고 갔지만, 나그네가 치울 것이 있고 주인이 치울 것이 있듯이 내 눈에는 치우고 닦아야 할 곳이 천지다. 먼저 도착한 막내 동서는 내가 바쁘게 치우는 것을 지켜본다. 도와주고 싶은 눈치지만 그래도 내가 할 일이기에 한참을 바삐 움직인다. 이제 손님들이 오셔도 안심이다.

 

가마솥에는 나물 많이 넣어서 추어탕을 끓이고 부엌에는 소고기국을 끓인다. 맛있는 냄새가 나자 시장기가 느껴진다. 반가운 얼굴들이 모두 모이기를 기다리며 아궁이의 숯으로 고기 구울 준비도 한다. 오랜만에 만나서 다들 안부도 묻고 서로 무거운 것도 날라다 준다. 여섯 동서들이 벌초모임 올 때는 반찬이 푸짐하다. 그 이유는 몇 년 전 내가 낸 아이디어 때문이다. 항상 동서들 모임이 있으면 각자 맛있는 반찬 한 통씩 가져오기로 약속을 정했는데, 처음에는 귀찮다고 불만도 있었는데, 해보니까 능률적이고 먹을 것도 푸짐해서 이제는 한 통이 아니라 두세 통도 가져오고 과일, 빵, 채소도 나누어 먹으려고 가져온다.

 

둘째 아주버님께서 귀한 염소고기를 고추장 양념해서 재워 오셨다. 이제 추어탕도 알맞게 끓여지고 내일 새벽 벌초를 어떻게 나누고 누가 그곳에 갈 것인지를 정한다. 저녁상을 물리고 과일 먹으며 회의를 시작한다. 큰아주버님의 인사 말씀에 이어 경과보고와 집안의 대소사도 의논한다.

 

집안의 사촌들이 한자리에 모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도 나누고 걱정거리도 들어주는 시간은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모두 한사람씩 돌아가며 인사시간을 드린다. 아이들도 그런 모습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라서인지 모두 사이좋게 연락하며 지낸다. 올해 두 명이 군대 제대하고 벌초 일꾼으로 새로 들어왔다.

 

비슷한 또래로 동서들이 결혼하고 아이도 낳다보니 한해는 저녁에 우유병 소독한다고 모여서 힘들다고 했던 적도 있었고, 어느 해는 대학교 입학한다고 했고, 그 뒤에는 군대 보내고 면회 다녀온 이야기로 밤을 지새웠는데 세월이 참 더딘 것 같아도 빠르다. 어느 새 우리들의 얼굴에도 주름이 생기고 하나둘 머리에 흰서리가 내린다.

 

식구끼리 벌초만 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다른 집과는 좀 다른 그림이다. 다소 번거롭고 힘들지만 사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1박 2일 보내며 오순도순 잘 지내는 지금의 모습이 난 좋다. 언젠가부터 여자들도 벌초모임이 가고 싶어지고 기다려졌다. 연말에는 잔액으로 부부동반 송년모임도 가진다. 우리 세대가 집안 어른을 섬기고 보살피는 모습을 자식세대가 보고 배울 수 있는 벌초모임이기에 더 의미 있다. 제일 큰형님께서 한 말씀하신다.

“어디가도 우리 집안처럼 화목하고 집안 대소사에 모두 앞장서서 돕고, 벌초도 남자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도 모두 모여 하는 곳은 없더라. 우리 총무가 연락도 잘하고 장도 잘보고 일도 척척 해내니 더 모임이 잘 돌아가는 것 같다. 동현아, 고맙다. 이번 모임도 수고가 많았어. 자, 모두 박수 한번 쳐줍시다.”

 

박수를 받고 보니 쑥스럽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도 아이마냥 어깨가 우쭐해진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로 생각한다. 모두가 한마음이기에 이 자리가 더 빛나고 화기애애한 것을. 고마운 마음 가득 담아 나도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에게도 박수 부탁드립니다. 다들 열심히 사시는데 힘내시라고. 그리고 오늘 모임 바쁜데도 시간 내어 많이 참석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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